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몬 볼리바르 (문단 편집) == 기타 == * [[시몬 볼리바르 교향악단]]과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이 이 사람에게서 따온 것이다. * 아메리카 대륙엔 볼리바르의 이름을 딴 지명이 많다. * 베네수엘라의 정식 국명은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Republica Bolivariana de Venezuela)'이다. 본래는 베네수엘라 공화국이었다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1999년 개헌 당시에 베네수엘라의 국명에 볼리바르를 넣자고 제안해서 바뀌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시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에서 건국공신으로 존경받아왔던 인물이다. * [[볼리비아]]라는 국명도 볼리바르에서 따온 것이다.[* 볼리비아의 수도 중 하나인 수크레는, 볼리바르의 부하 장군이자 페루와 볼리비아의 대통령을 지냈던 그 수크레에서 따온 것이다.] * 미국 미시시피 주에 있는 볼리바르 카운티 외의 많은 미국 지명[* 이 중에서는 '볼리버' (Oliver 앞에 B 발음 넣은 것)처럼 발음되는 경우가 많다.]과 이름에도 들어가 있다. * 볼리바르가 해방시킨 나라들의 '볼리바르'라는 지명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 2차대전 당시 전사한 미국 장군인 [[사이먼 버크너]]도 사이먼 볼리바르 버크너가 풀네임인데 그의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그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남미의 혁명가였지만 명성이 미국에도 많이 알려진 듯하다. * 가정적으로 굉장히 불행했는데 앞에서 말한대로 부모를 어린 시절에 잃었고[* 물론 큰누나와 작은누나, 형, 외삼촌 등 형제들과 외가 친지들이 있긴 했다.] 그가 사랑하여 2년간 구애한 끝에 결혼한 아내 마리아 테레사 델 토로도 결혼한지 8개월만인 21세에 [[황열병]]으로 사망했다. 아내가 자식없이 사망했고 볼리바르는 이때 크게 슬퍼하면서 두번 다시는 결혼하지 않아 이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사실 [[남아메리카 독립 전쟁]]의 와중에 마누엘라 사엔즈라는 여성과 사귄 적은 있었다. 허나 마누엘라는 볼리바르와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정작 볼리바르가 거부하여서 결혼이 실패한다. 그녀와의 결혼을 거부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란 콜롬비아]] 대통령 시절에 암살당할 뻔하는 등으로 생활이 무척 불안했던 것과 더불어, 그란 콜롬비아 해체로 인해 실각하면서 비참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일부러 차버렸다는 설은 있다. 공교롭게도 시몬 볼리바르와 많은 부분에서 비슷하다고 평가받는 [[튀르키예]]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애인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이쪽은 자신이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면 바로 자신에 대한 우상화의 명분이 될 것을 우려해서 그랬다.] 어린 시절 부모 양친이 사망하는 비극 없이 평탄하게 성장했던 다른 남미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인 호세 데 산마르틴과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와도 대조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이 둘은 후일 부모가 늙어 죽자 돌아가신 부모가 남긴 대농장 등 재산들까지 물려받았다.] [[파일:Venezuela 100 Bolivares.jpg|width=100]][[파일:attachment/볼리비아노/bob35.jpg]] *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의 통화인 [[베네수엘라 볼리바르]]와 [[볼리비아 볼리비아노]] 또한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2023년 기준 볼리바르 지폐 전권종과 200볼리비아노 지폐[* 정확히는 2명의 아이마라족 독립운동가 투팍 카타리, 바르톨리나 시사와 함께 그려져 있다.]의 도안이다. 그 밖에 과거 [[콜롬비아 페소]]와 [[에콰도르 수크레]] 지폐에도 도안으로 자주 등장했었다. * 남미합중국(United States of South America)을 꿈꿨을 정도로 미국의 정치 체제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당시 미국처럼 안정적인 공화정은 매우 드물었고, 혁명으로 왕정을 폐지한 프랑스 공화정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계몽주의의 전통을 이은 미국의 정치제도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동시에 '''[[미국]]을 매우 경계하였다. ''' 당시 미국은 대서양 연안에만 발을 걸친 2류국가였지만,[* 본격적으로 서부개발이 시작된 시기는 1860년 이후 [[남북전쟁]] 이후이다.] 시몬 볼리바르는 남미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남미 쪽에는 '''당시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을 쏟을 수 없었으며[* 어떤 작가가 스페인 문학사를 쓰려고 했더니 스페인어 사전이 하나도 없어서 유럽에 요청해야 했을 정도. [[먼로 독트린]]도 남미 독립이 완전히 끝난 1830년에 발표된 것이다.] 볼리바르가 활동하던 19세기 초 당시 미국은 북미대륙 동부 대서양 연안을 중심으로 갓 독립한 나라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이 대륙 중심부의 프랑스령을 팔아넘겼지만 개척은 고사하고 이제 막 탐사대가 오가던 정도. [[제국주의]]는 고사하고 집안살림 챙기기에 급급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우려대로 건국후 미국은 19세기 초반 [[영미전쟁]]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만큼은 당시 패권국이었던 영국과 맞먹는 실력을 가졌음을 보여줬고, 이 때부터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먼로 독트린"을 앞세워서 남미를 뒷마당으로 여기며 적극 개입했고, 현재까지도 남미의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우고 차베스]]가 볼리바르를 추앙했던 것도 이 점을 반영한다. * 시몬 볼리바르가 사용했던 검이 콜롬비아에 보관되어 있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espada+m19.jpg]] 원래 보고타의 볼리바르 생가에 보존하고 있었는데 1973년 2월 17일 콜롬비아의 반군인 M-19가 이걸 훔쳐가버렸다. 이때 M-19는 "볼리바르 당신의 검이 전쟁터로 돌아갑니다"(Bolívar, tu espada vuelve a la lucha)라는 똘기넘치는 글을 벽에 남기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 훔친 검의 행방을 두고 여러 설이 있는데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부터 콜롬비아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까지 다양하다. 특히 파블로 설은 파블로의 아들인 후안(Juan Pablo Escobar)가 증언한 부분이라 신빙성이 높다(출처:[[http://www.bbc.com/portuguese/noticias/2015/09/150911_narcos_historia_lab|스페인어]]). 이후 여러 곳을 떠돌던 검은 1991년에 다시 콜롬비아 정부로 돌아왔다. 이 검의 상징성 때문인지 베네수엘라 같은 상당수의 남미 국가들이 예검으로 볼리바르 검의 모조품을 지급하고 있다. * 게임 [[문명 6]]에서 [[문명 6/등장 문명/그란 콜롬비아|그란 콜롬비아]]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게임에서의 정복 성능이 너무 강력해서 해방자가 아니라 정복자로 만들어버렸다. 확장팩을 끼지 않을 경우 위대한 장군으로 등장한다. * 베네수엘라에서도 영웅으로 존경한다.[br][youtube(dCb1diJyreA)]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